[서적] 조총과 장부 (리보중 지음)
명대 중기, 중국 해적은 다시 힘을 모으기 위해 일본과 밀접한 곤계를 맺고 왜구의 구성원이 되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왜구를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로 구분하는데 전기 왜구는 14세기에서 1552년(가정 31)까지 활동한 서일본 출신들을 가리킨다. 후기 왜구(일본에서는 가정왜구라고 부른다)1552년에 활동한 왜구를 라리키는데 이들 중 다수는 중국인이었다. 명사에서는 "진짜 왜구가 3할, 왜구를 따르는 자가 7할"이라고 했는데 유세명언 양팔의 모험기에는 이 중국인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원래 왜구들은 중국인을 만나면 노약자까지 가차 없이 다 죽였다. 건장한 남자는 머리를 삭발하고 얼굴에 기름을 발라 왜구로 가장시켰다. 그리고 전투할 때 이들을 맨 앞에 세웠다. (...) 이 가짜 왜일들은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어떻게든 왜구들에 빌붙어 며칠이라도 잘 지내보려고 더욱 흉폭하게 굴었다. 진짜 왜구들은 이들을 앞세우고 자신들은 뒤에서 쫒아가곤 했다." 왜구를 평정하는데 앞장섰던 관리 정효는 "근래 왜구 중 중국인이 많은데 힘이 좋고 머리가 총명했다. 이들은 성동격서 전법을 구하사며 우리 약점을 공략했다. 수년 동안 이들이 끼친 피해가 막심하여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천한 신분으로 거칠고 용감한데 몸을 기탁할 곳이 없자 고향을 떠나 왜구가 되었다. 폭력배나 도망자, 관직에서 쫓겨난 자, 파계한 승려, 시험에 떨어진 서생들도 무리를 지어 왜구가 되었다. 소심한 자는 그저 호구지책이나 하려고 했고, 한이 많은 자는 분노를 표출하려고 뛰어들기도 했다"고 했다.
이 진짜와 가짜 왜구들은 서로를 이용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정효는 "왜구는 중국인을 앞잡이 삼고 중국인은 왜구를 발톱 삼아 서로 의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구 소탕에 공을 세웠던 또 다른 관리 종신은 "중국인은 교활해서 쉽게 왜구를 속인다. 성을 공략 할 때 선봉에 서는데, 고나병들은 왜구만 보다ㅗ 먼저 도망쳐버린다. 성이 함락되면 수천 명의 왜구가 한꺼번에 몰려 들지만 중국인들은 재빨리 금고를 털어 사라져버린다. 그래도 왜구들은 속은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관병이 반격해서 이들을 잡으면 주로 일본인들이고 중국인들은 한 명도 없었다"라고 했다.
(중략)
화기 전문가인 조사정은 서양, 동남아시아, 일본, 터키 등에서 온 총과 중국의 총을 비교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총이 수백 걸음 바깥의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는 것은 발화 장치 때문이다. 이 장치가 결정적인데, 루미가 가장 좋고, 서양 총이 그 다음이며 일본총이 제일 하품이다. 루미가 이렇게 좋은 것은 발사자가 발화 장치를 조작할 수 있고 손잡이가 달려서 다른 나라 것보다 위력이 세기 때문이다. 서양 총도 조작은 편하지만 불을 다루기 어렵고 힘이 전달되지 않아서 루미에 미치지 못한다. 동남아시아 총과 일본 총은 조작이 어려운데 일본 총은 기계가 복잡하여 매우 불편하다.
(중략)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시대, 선승 고잔을 중심으로 송학이 도입되었다. 궁정에서 송학을 익히기 시작하자 귀족들도 따라 배웠다.(중략) 하지만 16세기 중엽, 주자학은 막부 정권의 지지를 등에 업고 관학의 지위를 확보했고, 이후 260년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다.(중략)
일부 학자들은 명대 왜구 문제로 인해 중일관계가 악화되고 문화적으로도 멀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이 시기 일본은 사실상 '유학독존'함으로써 중국의 핵심 문화가 일본 사회에 깊이 자리잡았다. 1453년, 일본은 9척의 견명선을 중국에 보내 조공 무역을 했다. 승려 쇼운즈이킨은 이 과정을 기록하며 쇼운입명기라는 책을 썻고, 명나라의 중하급 관리인 중서사인이 한 말을 소개했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는 나라가 500개국이 넘는데, 그중 오직 일본인들만이 공부를 한 것 같소."
(중략)
중국 학자들은 인근 국가와의 관계를 연구할 때 '중국 중심론'에 치우치곤 한다. 중국인의 입장만 견지하다 보면 상대의 시각에는 소홀하기 쉽다. (중략)
중국인의 관점에서 중국과 일본은 '일의대수(옷의 띠처럼 좁은 강이나 바다를 사이에 둔 가까운 사이)'이며 2000년 동안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2013년 5월 4일 당시 일본의 아소 다로 부수상이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인도와 중국은 육로로 접해 있고, 일본과 중국은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 1500년 일중 역사에서 우리 관계는 한 번도 원만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한반도와의 관계도 '순치상의'에 비유한다. 하지만 2005년 6월 15일 당시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역사상 중국은 한국을 수백 차례나 침략했다"라고 말했고, 북한과 중국은 '사대주의적 관계로 엮여 있다'라며 비판했다.
베트나은 원래 중국에 속해 있다가 10세기에 중국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중국과 종속관계를 유지했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자 중국은 베트남을 독립시키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20세기 중엽, 중국은 미국에 맞서 싸우는 베트남 공산당에 전폭적으로 우너조해서 승리를 거뒀고, 이에 중국인들은 베트남 사람들이 중국의 도움에 감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역사상 베트남은 중국의 중앙 왕조에 반기를 드는 항쟁을 여러 차례 일으켰는데, 이를 '지방 반란'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침략에 대항했다'고 해야 할지 논쟁적인 문제다.
(중략)
반면, 유가 문화권의 국가에서는 왕권과 신권이 결함되지 않았다.
(중략)
1500년대 일본의 인구는 1540만 명으로, 1억 3000만 명인 중국의 7분의 1이자 800만 명인 조선의 두 배에 달했다.
(중략)
막부의 분열은 1336~1392년까지 계속되었고, 각지의 번주, 다이묘들은 독립적인 제후가 되었다. 아시카가 막부 시기에는 내전이 끊이지 않았고 국력이 쇠약해졌다. 1404년, 막부는 중국의 일본에 대한 명의상 종주권을 승인하고, 명나라가 중일 무역을 주도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약한 막부는 일본 각지의 번주와 다이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많은 다이묘가 살기을 찾아 바다로 나가 왜구가 되어쏙, 왜구가 창궐했다. 명나라는 왜구로 인한 '왜환'에 시달리자 일본과 몽골의 위험을 가리켜 '남왜북로'라고 불렀다.(중략)
평화적 수단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유지해온 중화 조공 시스템은 명대에도 이어졌다. 명나라 건국 초기, 태조는 두 가지 대외 정책을 공표했다. 첫째, 다른 국가를 공격하지 않는다. 둘째, 조공관계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해서는 안 되며 조공 무역과 사인들의 해외 무역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중략) 또한 태조는 특별히 '정벌해서는 안 되는 나라'를 열거했는데 조선, 일본, 류큐, 안남, 시암, 점성, 서양, 수마트라, 자와, 서자와, 삼불제국, 브르네오 등이 이에 해당되었다.(중략) 명대 후기의 문인 원굉도는 조선과 일본이 충돌했을 대 "이웃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데 나는 자식을 내보내 돕고 있으니 어찌 곤혹스럽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이는 이웃 나라의 분규에 대한 중국의 난처한 입장을 잘 표현한 말이다.
(중략)
역사상 웅대한 야심을 품었던 진시황, 한무제 같은 황제는 변방을 개척하려 애썻다고 후대의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진시황이 흉노를 징벌하려 할 때 승상 이사는 "불가합니다. 흉노는 성을 짓고 살지 않고, 마치 날아다니는 새처럼 자비각 수비지 않습니다."(중략)
서평:
1. 책의 내용을 옮겨 적은 부분에서 왜구인척 하는 중국인들 이야기 때문에 끝까지 읽은 책이다.
2. 중국, 그 중에서도 아마 대만 출신의 지은이라서 그런지 책의 상당 부분이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 된 내용이 많다는 점이 재미 있었고
3. 무역에서 출발해 군사, 문화, 조공 같은 다채로운 부분이 중국인들 관점에서 외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 볼 수 있는 책.
4. 중국인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때 한번 정도 볼만한 책이라 생각하지만, 내용적으로 좀 불편한 부분도 있는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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