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슬라보예 지젝 지음)
한국은 세계의 그라운드 제로이고 미래의 지구를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식민지와 전쟁, 독재와 기근을 차례로 겪은 한국인들의 마음은 자연스러운 신체의 짐을 벗어던지고 스스럼없이 디지털 세계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의 문화적인 저항은 전 세계 어떤 국가의 국민에게서도 확인 된 적이 없을 정도로 적었다. 이 나라가 단 몇 년 만에 이루어낸 경제적인 발전은 기술의 혁명 덕분이라는 것이 내 새악ㄱ이다. 문화적인 공간의 부재 속에서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수준의 개인화를 경험했고, 동시에 집단적인 마음의 궁국적인 연결로 쏠리게 되었다.
(중략)
1990년 독일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자리를 내놓은 후 베를린으로 가는 길에 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집을 갑작스럽게 방문했지만, 고르바초프가 (보안요원들과 함께) 브란트 전 총리의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누르자 그가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중략) 브란트 전 총리는 공산권의 붕괴를 용납한 고르바초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마음속으로 소련의 공산주의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권이 붕괴하면 서구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브란트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안적인 시스템 및 근로자의 권익을 약속하는 다른 생산 체계의 심각한 위협이 있어야만 근로자와 빈곤층에 상당한 배려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근로자와 빈공층에게 더 맞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대안이 사라질 경우, 복지국가의 해체도 가능하다.
(중략)
내부 고발자가 영웅니 진짜 이유는 그들-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지역 사회의 풀뿌리 단계에서만 개선될 수 있다는 소리가 흔히 들려온다. 국가의 체제가 너무 경직되어서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우려에 완전히 무감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상충되고 있는 문제들은 국제적인 조직과 활동 역시 요구한다.
냉소주의자들의 순진함
엉망인 상항에서 원하는 방법을 찾으려면, 이념적인 제약을 깨부수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가능할까? 권력자에 대한 냉소주의가 너무 직설적이고 개방적이어서, 이념에 대한 비판이 필요 없는 현재에도 가능한 옵션일까? 왜 우리는 시간을 들여서 고되기 짝이 없는 '징후적 독해'에 참여해 구너력자들의 공개적인 논의 속에서 차이와 억압을 알아내야 하는 걸까? (중략)이처럼 군력자들이 스스로 무슨 짓을 자행하고 있는지를 잔인하게 인정하는 냉소주의적인 사회의 개념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특히 이들이 공공연하고, 어느 정도는 현실적으로 모든 것은 권력과 돈, 혹은 영향력이 좌우하며, 그 결과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부족하다. (중략)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시작할 때, 거대하고 냉소적인 자본주의자들은 "히틀러가 좌파를 뒤집어엎어서 제거하도록 놔두자"고 스스로를 일깨웠다. 2008년의 금융 위기는 맹목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아나라 '탐욕은 좋은 것'이라는 원칙에 따라서 행동한 냉소적인 금융가들이었다. 따라서 냉소주의적 원인에 대한 슬로터다이크의 오랜 공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들은 이미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잔인한 '현실적'입장에 내재된 환겨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린다.
(중략)
이것이 오늘날의 냉소주의 정치의 공식이다. 이들에게 진짜 속는 사람들은 냉소주의자들 자신이다. 자신들의 숨겨진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비웃는 대상에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냉소주의는 왜곡된 태도다. 냉소주의는 또 다른 복제물(냉소적이지 않은)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지적한 것처럼 비뚤어진 태도는 무의식이 아니라 극도의 혼란이 발현된 것이다.
(중략)
소문을 좋아하는 이웃들의 달라진 반응은 초자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다. 초자아는 성적인 행동을 제한해서 성행위를 막는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에 불괗며, 실제적인 결과는 "어서 해! 즐겨! 우리가 금지한 것을 하길 원해!"라는 외침이다. 다시 말해서, 금지된 것을 어기면 죄책감을 갖지만, 따르면 더 큰 죄책감을 갖는다.(이것이 바로 초자의 역설을 설명한다. 명령에 따를수록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근본적인 모호함이 초자아의 구성 용소를 극단적인 수준까지 가져간다. 도덕적인 기준을 위반할 때, 죄책감을 갖는다. 이를 위반할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더 큰 죄책감을 갖는다. '초자아는 어떤 경우이거나 죄책감을 갖는 것이다.'
(중략)
1차 세계대전에 대한 환상에 가까운 전설 중 가장 훈륭한 것이 있다. 외딴 황무지에 있는 전선의 참호 사이에 위치한,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공간 어딘가에서, 반쯤은 미쳐버린 탈영병 무리가 썩어버린 시신과 폭탄이 터진 자리, 버려진 참호, 동국, 터널이 가득한 땅을 태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탈영병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 호주, 폴란드, 크로아티아, 벨기에, 이탈리아 등 모든 국가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고 알려졌다. 이들은 모두 우정을 나누면서 평화롭게 어울리고 있으며, 서로를 공격하지도 돕지도 않는다고 했다. 넝마를 걸치고, 수염을 길게 길렀으며, 절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다만 가끔씩 미친 괴성과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밤에 전투가 끝난 후에만 밖으로 나와서 시신을 뒤져서 물과 음식을 가져간다고 했다.
이 전설의 묘미는 전장에서 확인되는 미친 광기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대안적인 집단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의 병사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며, 이들의 적은 '전쟁'뿐이라는 점이었다.
(중략)
1937년에 오웰은 계급의 차이에 대한 좌파의 지배적인 태도가 모호하다면서 개탄했다.
우리는 모두 계급의 구분에서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계급을 폐지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혁명적인 의견이 부분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남모를 확신에서 힘을 끌어온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계급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나의 일부분을 없애는 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전형적인 중산층이다. 말로는 계급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쉽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계급의 차이에 따른 결과물이다. 내가 가진 모든 개념, 선과 악의 개념, 유쾌함과 불쾌함의 개념, 흥미와 심각함의 개념, 추함과 아름다음의 개념 등 모든 것은 중산층의 개념이다. 책과 음식, 옷에 대한 내 취향이나 명예심, 식탁 예절, 말하는 방법과 악센트, 심지어 몸의 특징적인 움직임까지 모두 사회적인 계급에서 중간의 위치에서 자라면서 얻은 특별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조지 오웰은 이 중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는 열정을 쏟거나 '노동자가 되려는 시도'도 거부했다. 실제로 오웰은 노동자들에게 목욕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웰이 중산층으로 남아서 계급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싶었다는 뜻일까? 문제는 오웰이 그 대안을 원했고, 그래서 그의 대안은 잘못된 것이었다. 진짜 혁명가가 되는 것은 '노동자같이 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빈곤층이 살아가는 방식을 흉내 낼 필요도 없다. 혁명 활공의 목표는 정반대로 전체 사회의 상황을 바꾸엇 노돌자들이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우레의 딜레마가 가진 두가지 기둥-중산측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 혹은 실제 노동자가 되는 것-은 당연히 중산층이 선택해야 할 문제다.
(중략)
복종하고, 종교를 믿으라고 해따. 총리는 끊임없이 최선에 대해 말했다("구매하고 기도하라") 이것은 아마도 터키 정의당의 신자유주의적('구매하고')이고, 온건한 이슬람적('기도하라')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것 같다.
서평
1. 일단 작가분(슬라보예 지젝)의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사항 : 이 분의 출신은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었음. 20세기의 내전 중에도 가장 지독한 내전을 경험한 분이다. 물론, 그게 이분이 직접 총을 들고서 민병대로 나섰다던가 학살의 주체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러나 가장 지독한 전쟁 중 하나를 직접 경험한 것이다. 의미도 목표도 없는 전쟁을.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무절제한 자본주의, 그리고 그것이 다시 붕괴하는 걸 직접 봤는데 거기에 대해 밝은 발언이나 글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2. 공산주의는 이제 확실하게 붕괴했고, 아직도 그 사상을 보유한 사람은 북한 같은 구 공산권 국가를 포함해도 이제 거의 희귀 생물 수준으로 없어진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공산주의에 대한 검토와 언급이 다시 되고 있다는 점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 위험한 가에 대한 증명이다.
3.물론 프랑스의 약탈자들이 과연 공산주의가 생겨날 때 쯤 만큼 심각한가?하면 그건 아니다. 그들이 약탈한 물건은 빨과 식료품이 아닌, 사치품이다.(소위 말하는 명품들) 물론 다른 방면을 생각해 보자면, 그 당시에는 약탈을 할 만큼의 명품이 없었다. 대부분의 명품은 양산되는 물건이 아니라, 주문을 받으면 그 시점에 가서야 다시 생산되는 물건이었다. 당연히 약탈을 당했다 해도 주문해 놓고서 아직 주인이 찾아 가지 않은 물건 정도였을 터이고, 대부분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건 식료품이었을 터이니까. 그러나 현대에는?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건 현금일 터이고, 사치품은 현금화 시키기 가장 좋은 물건이다. 약탈에도 경제성이라는 자본주의적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4. 책의 장점은, 지금 우리가 가장 화제인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는 점이다. 단점은 철학자들이 언제나 그렇듯 명백히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결론은 내주지 않는다. 단지 언제나 그렇듯 무엇이 어떻게 문제냐라는 부분까지다. 결국 그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게 언제나이 진리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런 책의 답답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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